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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족 세계여행

우리가족 일본여행 마무리. 한국과 일본 서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by junshufa 2024. 4. 3.

 

 

여행은 왜 하는 것일까요? 특히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 여행은 어떤 의미일까요? 물론 지친 일상의 스트레스와 피로를 푸는 힐링, 가족과 소중한 추억을 쌓기 위해 등등 수많은 목적이 있겠지만… 아이들에게 넓은 세상을 보여주어서 견문을 넓히고, 우리와 다른 삶의 방식을 겪어 보며 다양성을 존중하고 이해하게 하는 교육적인 측면도 클 겁니다. 물론 교육적인 부분이 너무 강조되면 자칫 아이들이 흥미를 잃어버릴 수도 있으니 너무 강조는 마시길 바랍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일단 여행은 그 자체가 즐겁고, 색다른 먹을거리도 많이 먹고, 신나는 경험을 많이 하는 것이 최고이지요.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교육적 의미가 가미되면 좋겠습니다. 저도 이 글을 쓰면서 저희 가족을 여행을 돌이켜보니 여행지에서 당시 초등 고학년이었던 큰아들에게 ‘나가사키와 핵폭탄’, ‘가고시마와 가미가제', ‘벳부와 온천의 생성과정'을 얘기해 주었지만… 대충 결과는 아시겠죠?  듣는 둥 마는 둥~  초반 몇 분이 지나가면 지루해서 ‘아빠~ 그만~’을 외쳤더랬죠. 아주 극소수의 아이들 말고는 거의 모든 아이들의 반응은 비슷할 겁니다. 물론 저의 설명 방법이 부족한 탓도 있겠지만, 아이들도 새롭고 신기한 외국 여행에서 지루한 수업을 받고 싶을 생각은 없을 겁니다. 단지 제가 바라는 교육적 목적이란 아이들의 중, 고등학교 교과 과정에서 관련 주제가 나왔을 때 이해에 도움이 될 정도의 배경지식을 습득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구구절절 가족 여행에 대한 글을 쓰는 이유를 정리하자면, 저는 ‘여행’을 역사, 지리, 과학, 외국어, 체육, 예술 등의 여러 교과가 합쳐진 ‘통섭의 소풍’이라고 생각합니다. ‘학습’이 아니라 ‘소풍’처럼 맘 편하게 떠나 즐기기지만, 학습을 완전히 떠나 있는 것은 아닌 일종의 학습 활동. 그래서 이 챕터에서는 교육적 차원에서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 관계, 서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여행자로 오해와 편견을 지우고 일본을 여행하기 위한 시선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그리고 이 챕터는 당연히 아빠, 엄마를 위한 이야기이니 아이들에게는 입도 뻥긋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나라에서 가까운 나라는 어딜까요? 바로 일본입니다. 중국도 가깝지만, 중간에 북한이 끼어 있으니 거리상으로는 후쿠오카가 가장 가까운 외국도시, 일본이 가장 가까운 외국이 되는 겁니다. 그럼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아빠, 엄마께서는 일본의 역사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계시나요? 제가 40대 초반이니 제 기준으로 중고등 학교 교과서에서 일본 역사에 대해 배운 부분은 삼국시대에 조금, 고려시대는 말기에 왜구의 등장 조금,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통신사 이야기 조금, 그다음엔 일제시대와 태평양전쟁 조금... 국사에서 잠깐 등장, 세계사에서도 잠깐 등장하고는 끝입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나라이고, 두 번의 침략 전쟁 때문에 역사적 감정이 가장 깊이 쌓인 나라, 우리나라를 36년이나 식민지배를 했던 특수 상대국인 일본에 대해 분량이 너무 작지 않았나 하는 의문이 들지 않으신가요? 사실 저라고 뭔 생각이 있었겠습니까? 그 당시에는 외워야 할 사건과 연도가 너무 많았기도 하고, 우리 국사나 세계사의 핵심 관련국이 중국이다 보니 중국 역사에 대한 높은 관심에 비해 일본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무협지와 중국 영화를 너무 좋아해서 중문과를 선택할 정도 중국에 대한 관심은 높은 학생이었습니다)

 대학 입학 이후 일본으로 여러 차례 여행도 가고, 취직한 후에는 일본으로 출장으로 많이 갔지만, 특별히 일본 역사와 사회에 대한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 제게도 틀을 깨게 한 한 사건이 이었는데요. 2014년도 독도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던 중에 발생했습니다.

 당시 제게 주어진 소재는 독도 영유권에 관한 내용으로 조선 시대 울릉도로 보냈던 관리 ‘수토사(搜討使)’에 관한 다큐를 제작하는 것이었는데, 1693년 울릉도에서의 안용복이 일본 어민에게 납치된 사건을 계기로 발생한 울릉도 영유권 문제의 내막을 밝혀내는 다큐멘터리였습니다. 당시 조선과 일본의 외교분쟁을 조사하다 보니 조선 중기 이후의 조선통신사에 대한 내용도 조사를 하게 되었는데요. 먼저 솔직히 고백부터 하자면 저의 무식함, 무관심에 대해 심각하게 반성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스스로 역사, 세계사에 관심을 많이 가진 학생이었고, 피디라고 생각했는데, 한국과 일본의 관계, 한일 역사에 대해 이리도 무지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한 것이 바로 조선통신사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였습니다. 조선 통신사란 단어가 중등 교과서에 등장하는 순간부터 다큐를 제작하던 2014년까지 저는 늘 조선 통신사를 선진 문명을 가진 조선(한반도)이  문화적으로 뒤쳐진 일본 열도 문화를 한수 가르쳐 주면서 교류했던 문화 사절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고등한 문명을 가진 우리가 하등 한 문명을 가진 일본에 가르침을 주었던 거라고 생각했지요. 그러면 일본은 조선 통신사를 어떤 의미를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딱 잘라 말하면 막부시대 일본을 통치했던 도쿠가와 쇼군(장군)의 취임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조공을 받치러 온 제후국 사절단으로 생각했습니다. 물론 당시 일본 막부가 조선 통신사의 방문을 대내적으로 이런 식으로 홍보를 하여 막부 정권의 위상을 세우는 방법으로 이용 해 먹은 이유도 있습니다. 동전의 양면이 있듯이 하나의 사건을 자의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하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조선 통신사의 경우와 같이 양측이 극단적으로 다르게 생각하는 사안도 드물 것 같습니다. 물론 조선 입장에서는 통신사 방문의 모든 비용을 일본이 부담했고(400-500명의 인원이 움직였고, 6개월에서 1년이나 걸렸기 때문에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었습니다), 대단한 환대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 측에서 초청 받아가서 문화적 가르침을 주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일본 측에서는 막부 쇼군의 취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국내적으로 쇼군의 위상 강화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그 비용을 부담하더라고 통신사를 받아들인 점도 이해가 되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통신사의 의미를 두고 이처럼 큰 견해차가 있는 것처럼, 한국사람과 일본 사람이 서로의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도 큰 차이가 존재합니다.

나라 도다이지(동대사)의 대불

 물론 교과서를 통해 자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는 점도 좋지만, 이 사건의 양면에 대해 객관적이고 다원적으로 바라보는 기회를 주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만, 임진왜란과 36년간의 식민지배, 두 번의 커다란 아픔을 준 가해국을 객관적으로 바라본다? 아마도 한국사람 입장에서는 쉽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인지 우리 역사 교과서 속에서는 한일 관계는 고대사 부분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삼국시대, 백제, 고구려, 신라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고대 문명의 기틀을 닦아 주었다는 내용이 많이 등장하죠. 조선시대에 와서는 조선 통신사가 선진 문명을 일본에 전하고 자랑했다는 내용이 다시 강조가 됩니다. 우리의 우수함을 강조함으로써 자긍심을 가지게 하는 것이죠. 일본 입장에서는 어떨까요? 일본은 한국에 대해 고대사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일본 고대사의 발전에 도래인(한반도로부터 건너간 이주자)들의 영향력이 상당히 컸고, 일본 천황(덴노) 가문도 한반도계 도래인과의 관계가 아주 밀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일본인들은 자신의 고대 문화의 형성에 대해 ‘한반도 도래인의 영향도 있었지만, 대륙의 문화가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왔다’ 정도로 도래인의 영향을 자연스러운 문화 전파의 과정이라고 보거나 그 의미를 축소하려는 의견도 사실 있습니다. 간단히 정리하면, 한국은 근대사 콤플렉스, 일본은 고대사 콤플렉스가 조금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서로가 가진 콤플렉스를 해소하기 위해 역사를 보는 관점도 자신이 바라보고 싶은 부분을 강조해서 보는 경향이 있게 된 것인데, 한국은 '고대사에서 일본 문명의 기틀을 세운 것은 우리 조상님들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우리 문화를 일본보다 앞선 선진문명을 가진 것처럼 생각해 버립니다.  일본 입장에서는 고대사의 콤플렉스를 다른 방향으로 해소하는데요. 임나일본부설(삼국시대 한반도 남부(가야)를 일본이 지배했다는 가설로 공식적으로 폐기된 학설) 같은 주장을 통해 '일본이 고대에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으니 우리가 다시 조선을 지배하는 것이 선조의 땅의 되찾는 것이다'이란 명분을 만들어 19세기 말 조선 침략 구실로 만드는 것 같은 방법입니다. 더 들어가면 어렵고 어렵고 지루해지니깐, 여기까지만 하는게 맞을 것 같습니다.

나라 국립박물관의 일본 목조불상

 그렇다면 ‘이러한  상호 콤플렉스를 넘어서 서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가 가장 중요한 문제일 것 같습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잘난 체 금지' ‘비하 금지', 그리고 ‘객관적으로'입니다. ‘잘난 체 금지’부터 이야기해봅니다. 일본의 고대문화에서 한반도 출신의 도래인의 영향이 컸던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문화를 전해주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어?’, ‘우리한테 고마워해' 같은 생각들은 우리 입장에서는 할 수 있지만, 일본인에게 공감받기를 원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냥 일본이 그 부분을 인정해주면 고마운 일이고,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것은 1500년 이전의 역사를 가지고 현재의 우리가 뻐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비하 금지’입니다. 비하라는 단어는 상대방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합니다. 옛날 일본의 다른 이름인 왜국(倭人)이 있습니다. 한자 풀이로 보면 왜 나라 ‘왜(倭)’는 고유명사로 바로 일본, 왜 나라를 지칭하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倭)와 함께 연상되는 한자가 바로 ‘키 작을 왜(矮)’입니다. 아무래도 옛날 일본 토착 민족은 키가 좀 작았나 봅니다. 그러다 보니 키 작은 일본인을 비하하는 의미로 왜인(矮人:키 작은 사람)이라고도 불렀다고 하는데요. 그러다 보니 나라 이름인 ‘왜(倭)’와 키 작음은 비하하는 ‘왜(矮)’가 혼용되어 사용되었을 수도 있고, 키 작은 민족이란 뜻에서 키 작음 왜(矮)란 한자에서 부수를 사람인 뜻(人)으로 체인지 해서 왜(倭)란 나라 이름이 만들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나 우리나라 해변에 침투해서 노략질을 했던 하던 일본인을 왜구(倭寇)라고 불렀는데, 한국말로 정확히 풀이한다면 ‘일본 출신 키 작은 도적놈’이 될 것 같습니다. 왜(倭)란 한자에는 ‘왜소하다’란 뜻이 기본 옵션으로 들어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외의 다른 이름 풀이도 있습니다. 일본인은 그들의 나라를 스스로 화국(和國) 혹은 대화국(大和國:일본 최초의 고대국가 야마토 정권을 한자로 이렇게 썼습니다)이라고 불렀는데요. 일본어 속에서 왜(倭)와 화(和)는 같은 발음으로 ‘와(は)'로 발음됩니다. 그들 스스로 ‘와(は일본어 발음)’을 和 와 倭 를 같이 표기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자라는 것이 중국으로부터 수입되어 사용된 것이니깐, 다른 나라(중국이나 한국)에서 일본을 지칭하는 왜국(倭國)을 들여와서 쓰다가 그 안에 포함된 부정적인 뜻을 깨닫고 스스로는 조화로운, 혹은 평화로움을 뜻하는 화(和)로 바꾸어서 화국(和國)이라 표기한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 메뉴판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한자는 화(和)인데요. 화식(和食)은 바로 일본식을 뜻하는데, 여기서 한자 화(和)가 바로 일본, 혹은 일본 스타일을 뜻하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왜국’ , ‘왜구’란 단어가 등장한 지 족히 2000년은 지났고, ‘일본인의 평균 신장이 아직도 작나?’란 질문에 확실히 답을 못하는 지금도 일본 하면 왜국, 키 작은 민족으로 연상하는 걸 보면 차별과 비하의 힘은 (부정적으로) 참 강한 것 같습니다. 물론 삼국시대-고려시대 우리나라 해변지역 선조들이 왜구의 노략질에 수없이 많은 피해를 당했고, 임진왜란 때 침략을 당해 수십만 명이 죽었고,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식민지배의 고통의 36년이나 당했으니 당연히 분통이 치밀고, 욕도 하고 싶고, 그들을 비하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정입니다. 하지만 분노를 우리 사회 발전의 원동력으로 전환하지 못하고, 일본 비하에만 집중하는 것은 아쉬운 일입니다. 그들을 비하 함으로써 우리가 돋보인다면 그야말로 '정신승리법' 아닐까요?

 

 서로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마지막 조건은 ‘객관적으로'입니다. 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얽혀 있는 한국과 일본이 서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서는 잘난 체 하고, 비하하고 싶은 감정에서도 벗어난 후, 서로의 장점과 단점을 찾아서 봐야 하는데… 사실 한국인 입장에서는 일본이란 나라의 장점을 딱히 배우거나 했기도 않았기 때문에 이것도 쉽지는 않습니다. 또한 인접한 국가이고, 2000년이란 긴 시간 동안 동료, 협력자란 느낌보다 경쟁자, 침략자란 이미지가 더 강하다 보니 일본을 객관적으로 본다… 어려운 얘깁니다. 어쨌든 여행을 하는 목적 중에 견문을 넓힌다는 중요 항목이 있다 보니 일본의 장단을 객관적으로 봐야 하는데, 가장 쉬운 방법은 제삼자의 시각으로 한일 관계를 보는 것입니다. 한국과 일본에 속하지 않는 다른 나라 사람의 시선이라면 서로의 장단과 이 둘 사이의 관계를 객관적으로 보았지 않을까요? 한일 고대사에 관련해서는 한일 역사학계에서도 심오한 논란이 있는 부분인데, 이 부분은 브루스 커밍스란 미국 역사학자의 ‘한국 현대사’란 책 내용 중에서 조금 발췌해서 알려드리면 이해에 도움이 되실 것 같습니다

 

 한국인들이 일본의 발전에 심오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 일본 역사가가 표현한 대로 백제 예술은 “아스카(飛鳥) 시대(552-644) 예술의 토대가 되었고", 왕릉 벽화는 고구려의 강력한 영향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일본의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이 모든 것을 부정하려들고, 그와 마찬가지로 남한과 북한의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한국을 일본의 옛 지배자요 “모든 고대 문명의 샘”이라고 생각한다. 냉정하게 평가된 최근의 증거는 일본이 옛 한국으로부터 선진적인 철기 생산품, 병기, 말 장식, 금이나 은으로 만든 장신구, 도자기, 새로운 정치술 등을 받아들였음을 보여준다. 이중 어떤 것은 중국에서 복제된 것이고 또 어떤 것은 한반도 거주민인 발명한 것이었다. 특히 “최초의 일본 무기와 도구를 만들어낸 철은 거의 전부" 한국에서 왔고, 일본인들은 말과 기수 둘 다한테 갑주(甲胄)를 입히는 고구려의 방식이 “화약이 강림하기 이전의 세계에서는 가장 위력적인 군사기술"이라는 것을 알았다. 한 미국 학자는 “한국을 AD 700년 이전의 일본 문화의 샘으로 보는 한국과 일본의 전문 사가들의 의견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하고 신중하게 요점을 피력한다  

 

                                                                                                                                             브루스 커밍스 <한국 현대사>

 

 읽어보면서 이해되셨죠? AD 700년 이전까지는 한국을 일본 문화의 샘으로 보는 것에 동의할 수 있다. 그럼 ‘700년 이후부터는 일본도 독자적인 문화를 발생시키기 시작했다’로 볼 수 있겠죠? 정리해보겠습니다잉~ 1. 신라의 삼국통일 이전까지는 우리가 영향을 많이 주었다  2. 신라의 통일 이후부터는 관계가 많이 멀어지면서 일본은 독자적으로 문화를 키워갔다 3. 일본에 문화를 전파한 우리 문화에 대해 자긍심을 가져야 하지만, 우리 문화가 일본 문화 형성에 끼친 영향을 스스로 과장하여 해석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럼 한국과 일본은 어떤 관계라고 봐야 할까요? 이 둘 사이의 관계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한 책도 있습니다. 유홍준 교수님의 '나의 문화유적 답사기 일본 규슈 편'입니다. 이 책에서는  세계적 베스트 ‘총, 균, 쇠’의 저자 제러드 다이아몬드( jared diamond)의 생각을 빌려 한일 관계를 어떻게 봐야 할지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임진왜란 뒤 도쿠가와 막부와 다시 친선적 교류가 이루어져 조선에서는 사신이 갈 때 이를 통신사(通信使)라고 하였다. 이는 ‘신뢰가 통한다'는 뜻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 ‘신뢰의 회복'이다. (...) 어떻게 하면 공생적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까? ‘총, 균, 쇠'의 저자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이렇게 충고했다.

 

아랍인과 유대인의 경우처럼 한국인과 일본인은 같은 피를 나누었으면서도 오랜 시간 서로에 대한 적의를 키워왔다. (...) 한국인과 일본인은 수긍하기 힘들겠지만, 그들은 성장기를 함께 보낸 쌍둥이 형제와도 같다. 동아시아의 정치적 미래는 양국이 고대에 쌓았던 유대를 성공적으로 재발견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말은 한일 양국인 모두에게 던지는 메시지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한일문제와 한일 교류사를 일방적 시각이 아니라 쌍방적 시각에서 보아야 한다.  

 

 

 엥? 아랍인과 유대인 같은 관계… 성장기를 함께 보낸 쌍둥이? 쉽게 수긍이 가지 않으시죠.  하지만, 유명한 학자분이 거짓말을 했을 리는 없고, 나름 깊은 연구의 결과일 텐데요. 제 생각에도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서양 사람인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눈에는 극동 아시아의 두 나라,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저렇게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리적 근접성에 따른 수많은 문화 교류의 흔적, 문화적 유사성, 인종적 유사성도 있을 테고요. 거기다 사실상 존재하는 서로에 대한 좋지 않은 민족 감정도 그런 판단의 증거가 되었을 겁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것처럼, 완전 남보다 가까운 누군가의 흥망에 더 큰 질투와 부러움을 느끼는 것도 인간의 일반적 감정 일 겁니다. 정치적 동반자였던 백제의 멸망, 백제의 부흥을 지원했던 일본,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 이후 급격히 멀어진 양국 관계. 고대 세계 깊은 교류를 나누었던 어제의 형제, 혹은 사촌이 오늘의 적으로 돌변한다는 설정.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으십니까? 드라마의 단골 소재이고, 현실 세계 속 재벌 형제의 난처럼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이니깐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일 관계가 쌍둥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사이였고,  가까웠던 만큼 작은 해석 하나에도 민감해 받아들일 수 있을 사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봐야 한다. ‘쌍방적 시각으로 봐야 한다'. 하지만, 당연히 쉽지 않습니다. 아직도 한국인 입장에서는 일본을 잘 모르고, 일본인 입장에서도 한국을 잘 모르니 객관적으로 보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감정의 커튼을 걷어내고, 객관적 시각에서 일본을 바라본다면 우리의 일본 여행은 훨씬 풍요로운 결과를 가져다줄 것 같습니다.